현지 항소법원, 사건 주모자에
“1심 재판부, 중대 재량권 남용” 이례적 인정
숨진 사업가 지익주씨 아내
“정의 실현에 너무 기뻐 눈물…
남편 피살 이유 밝혀져야”
지난 2016년 필리핀 현직 경찰들이 한인 사업가 지익주씨(당시 53세)를 납치 살해해 충격을 줬던 사건과 관련, 사건 주모자인 경찰관에 내려졌던 1심 무죄 선고가 2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으로 뒤집혔다.
11일(현지시간)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지난달 말 필리핀 마닐라 항소법원은 사건 당시 경찰청 마약단속국 팀장이었던 라파엘 둠라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을 깨고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reclusion perpetua)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둠라오가 지씨 납치•살인 등을 공모한 혐의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유죄로 인정된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또 둠라오의 하급자로 지씨를 직접 납치, 살해한 당시 마약단속국 소속 경찰관 산타 이사벨과 국가수사청(NBI) 정보원인 제리 옴랑에 대해서는 1심과 같이 무기징역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또 둠라오와 이사벨, 옴랑에 대해 지씨 유족에게 총 35만 필리핀페소(약 828만원)를 공동으로 손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들은 지씨 납치•살해 사건과 관련해 인질강도•살인•차량 절도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받아왔다.
검찰은 주모자로 지목된 둠라오가 지난해 6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판사의 중대한 ‘재량권 남용'(abuse of discretion)이 있다”며 항소했다.
필리핀에서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온 피고인을 상대로 판사의 중대한 재량권 남용이 있을 경우에만 항소가 인정되는데, 2심 재판부는 이를 이례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필리핀에서는 통상 항소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2년 이상 걸린다”면서 “1심 무죄 판결이 뒤집힌 것은 물론, 지난해 9월 항소 이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2심 판결이 나온 것도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앞으로 둠라오 측이 항소 재판부에 재심을 신청한 뒤 기각되면 대법원에 상고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그가 계속 사법적으로 단죄될 수 있도록 필리핀 관계 기관에 협조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당국은 아직 둠라오 신병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이며, 이날 또는 12일에 그에 대해 체포영장과 출국 금지 조치를 신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씨는 2016년 10월 18일 오후 2시께 필리핀 북부 루손섬 앙헬레스시 자택에서 이사벨, 옴랑에 의해 납치됐다. 이들은 지씨를 자신들의 차량에 강제로 태운 뒤 경찰청 마약단속국 주차장으로 끌고 가서 살해했다.
이어 다음 날 오전 11시께 인근 칼로오칸시의 한 화장장에서 지씨 시신을 소각하고 유해를 화장실에 유기한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다.
또 범죄 과정에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가 지씨가 납치돼 피살된 사실을 모르는 유족을 상대로 몸값을 요구해 500만 필리핀페소(약 1억1천800만원)를 뜯어내기도 했다.
이 사건은 현직 경찰들이 대낮에 직접 납치•살해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필리핀 한인사회는 물론 많은 현지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에 2017년 1월 30일 로드리고 두테르테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 지씨 아내 최경진씨를 만나 “깊은 유감과 함께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매우 미안하다”고 위로하는 한편 충분한 배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번 항소심 판결에 대해 지씨의 아내 최씨는 연합뉴스에 “둠라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너무 기뻐 눈물이 났다”면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다시 생겼다”고 심경을 밝혔다.
그는 “1심에서 둠라오 무죄 판결이 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아 거의 정신을 잃었었다”면서 “1심 결과를 뒤집기 어렵다고 들어 크게 기대 안 했는데 너무나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남편이 살해된 이유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면서 “둠라오가 유죄 판결을 받아 앞으로 윗선 관련 여부 등 남편이 숨진 이유에 대해 새롭게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든다”고 했다.
특히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약속한 국가 배상과 관련, 최씨는 “필리핀 공무원들이 한 짓이었으므로 필리핀 정부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필리핀 정부에 소송을 내도 정부가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고 하니 개인인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면서 “따라서 우리 정부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대사관 관계자는 “이상화 주필리핀 대사 등이 필리핀 법무부•검찰청 등 관계 기관들을 계속 접촉하면서 사법 정의 실현을 위해 판결이 너무 늦어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연합뉴스]
또 “한인 사회도 추모식 개최 등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여론과 관심을 지속하려 애썼다”면서 “사법 정의의 승리로서 이번 판결을 크게 환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