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역대 대통령 가운데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2016∼2022년 재임)만큼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도 드물 것이다. 스스로 ‘악과 싸우는 독재자’로 칭하면서 “총알도 아깝다. 강력범은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와 같은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필리핀의 트럼프’라는 별명도 얻었다.
마약과의 가차 없는 전쟁을 통해 마약범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등 ‘잔인한 통치’를 했고, 그 과정에서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저질러 수많은 희생을 낳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그의 통치 스타일은 임기 내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일반적으로 필리핀 국민들은 기득권층인 전통적 엘리트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강력한 지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두테르테는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퇴임 후에도 필리핀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고, 딸 사라 두테르테가 2022년 대선에서 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후광 덕이었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필리핀의 장기 집권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당선이 불확실하다고 보고 일반 국민에게 인기가 높았던 사라 두테르테를 부통령 후보 러닝메이트로 영입했다. 필리핀은 오랫동안 주요 엘리트 가문 간에 경쟁과 연합을 통해 권력을 창출해왔다. 족벌·세습정치가 만연한 나라다. 마르코스 가문과 두테르테 가문 간 연합은 대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딸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자리를 나눠 가진 것이다.
두 가문의 ‘정치적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 출범 후 여러 정책에서 갈등했다. 외교 노선에서도 마르코스 대통령은 친미, 두테르테 부통령은 친중 성향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두테르테 집권 시절 마약과의 전쟁과 관련된 불법 행위 조사를 둘러싼 갈등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증폭했다. 정치적 압박에 대한 두테르테 부통령 측의 반발도 거셌다. 결국 양측의 갈등은 지난해 11월 23일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다. 두테르테 부통령은 이날 온라인 회견에서 자신에 대한 암살 계획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암살되면 대통령과 가족 등을 죽이라고 경호원에게 지시했다는 말까지 했다. 이 회견은 부통령에 대한 탄핵을 앞당기는 요인이 됐고, 탄핵은 하원에서 가결된 후 마지막 상원 심리를 앞두고 있다.

결국 두 가문의 갈등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체포로까지 이어졌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두테르테에 대해 재임 시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을 필리핀 정부가 도운 것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임기 초반 두테르테에 대한 ICC의 조사를 거부해왔으나 두테르테 가문과의 정치적 동맹이 깨진 후에는 조사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마닐라 공항에서 체포된 후 몇 시간 만에 곧바로 ICC 법정이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압송돼 수감됐다. 마르코스와 두테르테 가문은 함께 손잡고 정권을 창출했지만, 정치적 불화 끝에 필리핀 전직 대통령을 국제법정에 세우게 된 셈이다. 권력투쟁에서 두테르테 가문이 패한 결과다.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