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니·네팔·동티모르 이어
필리핀서도 시위 중 폭력 사태
2022년 스리랑카·작년 방글라데시선
정권 교체 이끌어내
2010년 ‘아랍의 봄’,
15년만에 아시아서 재현 가능성 주목
최근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곳곳에서 특권층의 부패와 불평등에 반발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네팔과 동티모르에 이어 필리핀까지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젊은 층인 이른바 ‘Z세대’의 분노가 잇따른 시위의 동력이 됐다.
이들 나라에서 벌어진 시위의 촉매제는 모두 달랐지만, 분노의 밑바탕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 층이 부패를 저지르는 특권층의 사치스러운 삶을 지켜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깔려 있었다.
일각에서는 2010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반정부 시위와 정권 전복 시도가 잇따른 ‘아랍의 봄’이 15년 만에 아시아에서 재현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국회의원 월 430만원 주택수당에 인니 청년들 ‘분노’

최근 아시아에서 벌어진 도미노 반정부 시위는 지난달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시작했다.
지난해 9월부터 인도네시아 하원 의원 580명이 주택 수당으로 1인당 월 5천만 루피아(약 430만원)를 받은 사실이 언론 보도로 뒤늦게 알려지자 분노한 대학생과 노동자 수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5천만 루피아는 자카르타 월 최저임금인 540만 루피아(약 46만원)의 약 10배에 달한다.
시위대는 급격히 치솟은 세금과 실업률로 많은 국민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에게 주는 특혜가 지나치다고 반발했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5%대 경제 성장률을 유지했으나 제조업 분야 일자리 감소로 노동자들 불만이 커지는 상황이다.
올해 상반기에 공식적으로 해고된 노동자 수는 4만2천명을 넘었고,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나 급증한 수치다.
국회의원 특혜에 반대하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해 방화와 약탈 등이 벌어졌고, 경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오토바이 배달 기사를 포함해 10명이 숨지고 20명이 실종됐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의회는 논란이 된 국회의원 주택수당을 포함한 여러 특혜를 폐지하고, 스리 물야니 재무부 장관 등을 교체하는 내각 개편을 했다.
이후 시위는 진정됐으나 악화한 경제 상황과 특권층 부패가 언제든 또 다른 시위의 불씨가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부패 지켜보며 빈곤에 시달린 네팔 ‘Z세대’도 화났다

인도네시아에 이어 네팔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지난 5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26개 소셜미디어(SNS) 접속을 차단하면서 시작했다.
네팔 정부는 가짜 뉴스가 확산한다며 당국에 등록하지 않은 SNS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젊은 층은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반부패 운동을 억누르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SNS 접속 차단은 시위의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 밑바닥에는 불평등으로 인해 특권층을 향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특권층 부패를 지켜보며 빈곤을 견디던 네팔 ‘Z세대’는 부패 척결과 경제 성장에 소극적인 정부에 실망하다가 결국 폭발했고, 이는 폭동 수준의 과격한 시위로 이어졌다.
부패감시단체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네팔은 부패인식지수 조사에서 전체 180개국 가운데 107위다.
이른바 ‘네포 키즈'(nepo kids)로 불리는 고위층 자녀들은 사치스러운 생활과 많은 특권을 누리는 반면 대다수 청년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해야 하는 현실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네팔 인구 3천만명 가운데 20% 이상이 빈곤층이며 1인당 연 소득도 1천400달러(약 194만원)에 불과해 남아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수준이다.
네팔 정부는 매일 청년 2천명 이상이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행정 수반인 샤르마 올리 총리와 장관 4명이 사임했으나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와 올리 총리 자택 등지에 불을 지르는 등 더 격화했다.
심지어 스누 프러서드 퍼우델 부총리 겸 재무부 장관은 수도 카트만두 거리에서 시위대에게 폭행당했고, 속옷만 입은 채 시위대 여러 명에게 팔다리가 들려 끌려다녔다.
아르주 라나 데우바 외무장관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시위대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장면도 SNS를 통해 퍼졌다.
지난 8∼9일 이틀 동안 벌어진 시위로 네팔에서 경찰관 3명을 포함한 72명이 숨지고 2천113명이 다쳤다.
동티모르와 필리핀서도 젊은 층 주도 ‘반정부 시위

동남아시아에서 최빈국으로 꼽히는 동티모르에서도 의회가 국회의원 65명에게 도요타의 새 스포츠유틸리티차(SUV)를 지급하기 위해 예산 420만 달러(약 58억2천만원)를 편성하자 대학생들이 반발했다.
대학생 2천명은 지난 15일부터 사흘 동안 수도 딜리에서 공공기관 건물을 파손하고 정부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시위를 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진압했다.
141만명이 사는 동티모르는 인구의 40%가량이 빈곤층이며 불평등, 영양실조, 높은 실업률 등 사회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과거 450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7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내 인도네시아에 점령됐고, 이후 24년 동안 학살당하거나 실종된 동티모르인이 20만명에 달하는 아픈 역사가 있다.
대학생 시위에 놀란 동티모르 의회는 국회의원에게 새 차량을 지급하기로 한 결정을 철회했고, 국회의원의 종신 연금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전날 필리핀에서는 정치권의 비리 의혹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49명이 체포됐다.
태풍 등으로 홍수 피해가 잦은 필리핀은 지난 3년 동안 9천800건이 넘는 홍수 예방 사업에 약 5천450억 필리핀페소(약 13조2천억원)를 투입했다.
그러나 이 사업의 부패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2023년부터 올해까지 약 423억∼1천185억 필리핀페소(약 1조300억∼2조8천8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주 상원에 출석한 건설회사 사주 부부는 홍수 예방 공사와 관련해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을 포함한 하원의원 17명에게 뇌물을 줬다고 주장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사촌이자 실세인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은 결국 사임했으며 앞서 지난주에는 프랜시스 에스쿠데로 상원의장도 홍수 예방 사업 계약업체와 연관설이 제기된 여파로 교체됐다.
마닐라 집회에 참석한 학생 운동가 알테아 트리니다드는 AP 통신에 “우리는 가난에 허덕이면서 집과 미래를 잃어가는 동안 그들은 우리 세금으로 호화 차량과 해외여행을 누리며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높은 실업률·부패 심각 공통점…”청년층의 경제적 좌절감”

최근 몇 년 사이 아시아 국가에서 잇따른 반정부 시위에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들 나라가 모두 개발도상국으로 뿌리 깊은 정치 계급이 존재하고 청년 실업률이 높은 데다 부패 수준도 심각하다고 짚었다.
또 젊은 세대는 성장 과실이 엘리트에게 돌아갈 뿐 자신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청년실업률(15∼24세)은 스리랑카 22.3%, 네팔 20.8%, 인도네시아 13.1%로 세계 평균(13.5%)과 비슷하거나 높았다.
방글라데시 평화안보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샤프카트 무니르는 FT에 “이 지역(아시아)에서 Z세대가 정치 지도자들에게 ‘변화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세계적 시각을 가진 Z세대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며 “그들에게 인터넷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명의 피와 같아서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네팔 정치 평론가인 아미시 라즈 물미도 “국가는 여전히 일반 시민들에게 무관심했고, 총리와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에게 도전할 누군가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왕처럼 행동했다”고 비판했다.
앞서 2022년 국가부도(채무불이행)를 선언한 스리랑카에서도 엄청난 물가 상승과 생필품 부족으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고타바야 라자팍사 당시 대통령은 해외로 달아난 뒤 하야했다.
지난해 방글라데시에서는 ‘독재자’로 불린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가 독립전쟁 유공자의 후손에게 공직 30%를 할당하는 정책을 추진했다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밀려 인도로 도피하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 소속 남아시아 전문가인 크리스토프 자프렐로는 “아시아 일부 지역 청년층 불만은 주로 부패한 권위주의 정권 때문이지만, 사회경제적 좌절감도 반영한다”며 “실업으로 고통받는 빈곤한 청년과 부유층 사이의 불평등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