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과·LMO 시장은 이미 개방…
과학적 평가·절차 거치면 수입 가능
정부가 오는 25일 예정된 한미(韓美) 통상협의에서 농산물 카드로 쌀과 소고기 시장 확대는 쓰지 않기로 가닥을 잡았다. 이번 협상에서 국가 식량안보와 직결된 농산물 대신 바이오에탄올용 옥수수 등 ‘연료용 작물 수입 확대’ 카드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본과 인도네시아 등 다른 국가가 대미 통상협상에서 모두 자국의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만큼 한미 협상에서도 이에 대한 압박이 거세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농업계 반발 큰 소고기·쌀은 ‘레드라인’ 가닥
23일 연합뉴스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우리 정부는 전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농산물 품목인 쌀과 소고기 시장 개방은 협상 카드로 제시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껏 협상 카드 중 농산물 분야에서 미국이 요구한 미국산 쌀 수입 확대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허용이 쟁점으로 거론됐으나 우리 정부는 농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민감도를 고려해 두 품목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쌀은 많은 농민의 생계와 연결된 품목이다.
또 30개월령 이상 소에서 광우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위험 물질이 검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한국은 지난 2008년 이후 30개월령 미만 미국산 소고기만 수입하고 있다.
미국산 쌀, 소고기 수입 확대는 다른 국가와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쌀의 경우 한국은 미국과 중국, 호주, 태국, 베트남 등 5개국에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을 적용하고 있으며 미국에 할당한 물량이 13만2천304t(톤)으로 32%를 차지한다.
미국 물량을 늘리고 다른 나라 물량을 줄이려면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미국만 더 늘려주려면 통상절차법에 따라 국회 비준이 필요하다.
소고기는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라 광우병이 발생한 날부터 5년이 지나지 않은 국가산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는 수입 금지 품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번에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이를 허용하면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 통상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대신 정부는 이번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을 통상 카드로 써야 할 경우 ‘연료용 농산물’ 수입 확대를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바이오에탄올용 옥수수 같은 연료용 작물 수입이 가능하고, 식량용 작물과 시장 자체가 달라 식량안보 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옥수수의 경우 자급률이 0.7%에 불과해 국내 생산자와 충돌 우려가 없는 작물로 꼽히며 100%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가 새 과제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입한 옥수수를 주로 사료용과 식용(전분당)으로 쓴다.
작년 기준 세계 각국에서 수입한 옥수수는 1천130만t(톤) 규모로 집계됐다. 이중 미국산이 22% 수준이다.
수입 옥수수 중 미국산의 비중은 매년 가격에 따라 달라지는데 지난 2023년에는 10% 미만이었다.
다만 현재까지 국내에서 옥수수로 직접 바이오에탄올을 만드는 대신 바이오에탄올 자체를 수입하고 있어, 연료용 옥수수 수입량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용 바이오에탄올은 주로 미국에서, 음용 에탄올은 주로 브라질에서 각각 수입한다.

일본 등 5개국, 대미 협상서 ‘농산물 카드’…
우리 측에도 압력 높일 듯
앞서 미국이 우리 측에 요구해온 사과와 유전자변형작물(LMO) 감자 수입 허용은 통상 협상과 별개로 이미 시장이 개방돼있어 과학적 평가와 절차를 거치면 수입이 가능하다.
농산물 검역 협상의 경우 병해충 유입 위험성을 평가하고 이에 대한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절차를 거치면 된다.
미국은 약 30년 전 사과 검역 협상을 요청했고, 수입 위험분석 8단계 과정 중 2단계에 있다.
우리나라는 주로 사료용 옥수수와 대두를 유전자변형생물체(LMO)로 수입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이 지난 3월 ‘적합’ 판정을 내린 미국 심플롯사의 식품용 LMO 감자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안전성 검사 절차만 남은 상태다.
산업계 일각에서는 ‘쌀·소고기’를 제외하면 협상 카드가 약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과 새로운 무역 협상을 완료한 국가는 영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까지 모두 5개국인데 대부분 자국의 농산물 시장 확대를 카드로 썼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이 부과하는 상호관세 세율을 32%에서 19%로 낮추는 대가로, 미국이 수출하는 품목인 자동차와 농산물, 의약품에 대한 각종 규제 적용을 면제하기로 했다.
일본은 미국과 상호관세 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쌀과 일부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기로 했다.
영국 역시 미국산 소고기와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영국산 자동차와 철강,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내리도록 했다.
이들 국가의 협상 결과를 고려하면 미국이 우리 협상단을 상대로 농산물 추가 개방 압력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
국내 농축산업계도 한미 협상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 채 지켜보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농업인단체는 앞서 통상당국이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미국산 농축산물 추가 개방에 나설 것임을 시사하자 단체 행동을 예고하기도 했다.
한국농축산연합회와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 축산관련단체협의회, 농민의길 등 농축산업 단체들은 지난 18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농업인의 양해와 동의 없이 농축산물 관세, 비관세 장벽을 허문다면 절대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농업의 지속성 확보와 5천만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