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이슈가 말랑 칸주루한 경기장에서 131명의 관중이 사망한 참사에 대한 수사와 책임공방이었다면, 가장 큰 정치권 이슈는 나스뎀당(Nasdem)이 아니스 바스웨단(Anies baswedan) 자카르타 주지사를 대선 후보로 추대한 것이다.
복지정의당(PKS), 민주당 두 야당과의 정당연합 결성에 난항을 겪던 나스뎀당이 뜬금없이 독자적으로 아니스를 대선 후보로 추대한 것은 미처 예견하지 못한 파격이었고 대선판 입장권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나스뎀당의 추대에 주저없이 화답한 아니스의 결정은 주지사 퇴임을 불과 보름 앞둔 시점에서 곧 대중의 시선이 닿지 않는 무대 밑으로 무작정 내려갈 수 없다는 초초함이 낳은 악수(惡手)처럼 보였다. 나스뎀당 단독으로는 결코 아니스를 대선판 위에 올려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스 대선출마 파장
하지만 그 행보는 즉각적으로 정치권에 상당한 파장을 낳았다. 나스뎀당과의 제휴에 순순하지만은 않았던 두 야당 중 복지정의당(PKS)이 갑자기 아니스와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Agus Harimurti Yudhoyono) 민주당 당대표 조합의 정-부통령 후보 지명을 전제한 정당연합 협의가 아직 유효하다며 나스뎀당의 바지가랑이를 잡는 모양새를 보인 것이다.
현재 2024 대선 당선가능성 상위권 세 명 중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그린드라당(Gerindra) 총재에 이어 아니스도 나스뎀당을 타고 출마 선언을 하자 야당들은 아직 후보를 구체화하지 않은 골카르당(Golkar)-국민수권당(PAN)-통합개발당(PPP)의 연합체인 통일인도네시아연합(KIB)이 나스뎀당을 끌어갈까봐 허겁지겁 선수를 친 셈이다. KIB의 정당들은 나스뎀당과 함께 모두 조코위 정부 연정에 참여하고 있어 오히려 그들이 아니스를 중심으로 제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간 나스뎀당의 손을 잡을 듯 말 듯 애를 태우던 야당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편 당선가능성 상위권 세 명 중 마지막 한 명인 간자르 프라노워(Ganjar pranowo) 중부자바 주지사는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치솟는 반면 정치권 안팎에서는 찬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그를 자당 잠재 대선주자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하던 나스뎀당이 아니스를 후보로 확정한 후 갑자기 적대적으로 돌아선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다.
그런 태도는 주로 나스뎀당 원내총무 아흐맛 사흐로니(Ahmad Sahroni) 의원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중부자바 바탕(Batang)의 한 파이프공장 기공식에서 바흐릴 라하달리아(Bahlil Lahadalia) 투자부 장관이 ‘자카르타는 날씨가 어두운데 주지사님 얼굴이 빛난다’는 취지의 말을 하며 단상에서 간자르를 맞은 것까지 문제삼았고 나스뎀당이 간자르 대신 아니스를 선택한 것에 대해 ‘간자르의 태도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라며 비난에 가까운 답변을 내놓았다.
당시 또 다른 잠재후보로 언급했던 안디카 뻐르카사(Andika Perkasa) 통합군사령관에 대해 나스뎀당이 이제 부통령 후보 중 하나로 거론하고 있어 간자르에 대해서만큼은 완전히 선을 긋고 2024 대선의 적장으로 새로 분류한 분위기가 읽힌다.
간자르에게 적대적인 투쟁민주당 엘리트들
물론 간자르를 가장 적대시하며 주저앉히려 하는 것은 그가 소속한 투쟁민주당(PDI-P)의 엘리트 의원들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된다. 스마랑의 한 도로에 세워진 투쟁민주당 소속, 메기와티의 장녀인 푸안 마하라니(Puan maharani) 국회의장 옥외광고판의 대선 3연승을 뜻하는 ‘해트트릭을 이루자’는 카피 밑에서 ‘siap!’(잘 알겠습니다!)이라며 양손 엄지를 치켜세운 간자르의 모습이 인스타그램에 오르자 당 중진 의원인 밤방 우르얀토(Bambang Wuryanto)가 나서 ‘siap’의 또 다른 중의적 의미인 ‘준비하다’는 뜻으로 말꼬리를 잡아 ‘일할 준비가 됐다는 거냐? 잠자러 갈 준비가 됐다는 거냐?”고 밑도끝도 없는 갑질을 시전했다.
밤방 의원의 당내 직책 중 하나가 선거성공팀장인데 그가 가장 높은 당선가능성을 보이는 간자르에게 저렇게 함부로 하는 것은 그가 성공시킬 의무를 진 선거가 간자르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푸안의 대선출마를 지지하는 이른바 ‘대령위원회’라는 당내 엘리트 그림자 조직의 수장으로 간자르를 지지하는 당내 소장파 ‘상병위원회’와 당원-일반 국민들로 이루어진 간자르 지지단체 ‘간자르네 집’(Rumah Ganjar)을 싸잡아 비난하길 서슴지 않는다. 그들 모두 메가와티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 투쟁민주당 총재의 뜻은 정녕 지지율 1위의 간자르를 기어코 주저앉힌 후 자신의 딸이자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손녀인 푸안 마하라니를 대선주자로 내놓아 수카르노 가문의 3대 대통령을 내려는 것일까?
투쟁민주당이 그린드라당의 프라보워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분위기는 여러 지점에서 감지된다. 최근 간자르에게 사실상 역전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러 차례 대선 도전 경험을 가진 프라보워는 일련의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2024 대선에서 가장 높은 당선가능성을 보이는 후보다.
그린드라당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최근 이슬람 기반의 국민각성당(PKB)와 제휴하여 대선판 입장권을 확보함과 동시에 지지자들의 저변을 넓혔다. 대선 필승을 위해서 거기에 투쟁민주당과의 제휴를 더하는 것는 매우 매력적인 옵션이다.
투쟁민주당이 간자르를 주저앉히고 푸안을 내세우는 것으로 확정하고 프라보워-푸안이 러닝메이트가 되면 대선 전선은 사뭇 단순해져 프라보워로서는 아니스 한 명만 상대하면 된다.
비록 투쟁민주당이 ‘해트트릭’을 표방하고 있지만 양당의 제휴가 이루어질 경우 여론조사 기준 당선가능성 1%의 푸안에게 돌아갈 것은 부통령 후보 자리뿐이다. 하지만 1999년 당시 메가와티도 압둘라흐만 와히드(Abdurrahman ad-Dakhil Wahid) 제4대 대통령의 부통령을 하다가 와히드 대통령 탄핵 후 제5대 대통령으로 자동승격해 전임대통령 잔여임기를 소화했으니 푸안에게도 차기를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히 거래가 가능해 보인다.
메가와티와 프라보워 : 원수 또는 동지
이 같은 거래는 사실상 메가와티와 프라보워 사이에 깊은 신뢰가 없다면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두 사람은 2014년과 2019년 대선 당시 상대당 총재였고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연거퍼 당선되고 프라보워가 대선결과에 불복하면서 당 차원의 충돌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2009년엔 두 사람이 러닝메이트가 되어 수실로 밤밤 유도요노와 대선에서 맞붙기도 했던 사이다.
두 사람 사이 애증은 연조가 깊다. 1965년 10월 1일 새벽에 벌어진 9.30 친위쿠데타 실패 이후 몰락하기 시작한 수카르노를 1967년 완전히 축출하고 제2대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는 1970년 수카르노의 비참한 죽음을 방치하다시피 했다. 1947년생 장녀인 메가와티는 23세에 그 상황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한편 네 살 아래인 1951년생 프라보워는 전도유망한 육군장교 시절인 1983년 수하르토 대통령의 차녀 띠띡 수하르토와 결혼해 메가와티의 철천지 원수 수하르토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동티모르에서 군생활을 시작한 프라보워는 1978년 동티모르 제2대 대통령 니콜라우 도스 레이스 로바토(Nicolau dos Reis Lobato)를 사살하는 작전에서 전공을 세우며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 프라보워가 자카르타 폭동과 수하르토 하야로 얼룩진 1998년 띠띡과 이혼하고 군에서도 쫓녀간 후 요르단 망명생활을 할 당시 메가와티의 남편 고(故) 타우픽 키에마스(Taufik Kiemas)가 중재자로 나서 프라보워의 인도네시아 복귀를 도우면서 두 사람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일었다. 수하르토 가문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프라보워에게 더 이상의 악감정이 남지 않아서일까? 그렇게 손잡은 두 사람은 결국 2009년 대선에서 러닝메이트가 되기에 이른다.
최근 두 번의 대선으로 잠시 반목하던 상황을 뒤집어 그린드라당을 조코위 정권의 연정에 끌어낸 것도 메가와티의 영향이 컸다고 하며 이를 증명하듯 지난 10월 5일 대통령궁에서 열린 77주년 인도네시아 국군의날 행사장에서도 두 사람은 마치 남매가 만나 근황을 전하며 하소연하듯 친밀한 장면을 연출했다.
아직 2024 대선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시점에 투쟁민주당과 그린드라당이 결국 제휴하여 한 배를 탈 것인지는 예단하기 이르지만 가능성이 다분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기 위해 양당 모두, 그렇지 않아도 당내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는 간자르 프라노워라는 변수를 어떻게든 이번 대선 방정식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인니투데이ㅣ배동선 논설위원
[저작권자(c) 인니투데이,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