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 사태는 수카르노(Sukarno) 대통령 집권 말 정치•경제적 혼란 속에서 발생한 소장파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당시 전략예비군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 소장은 이 쿠데타를 무력진압하는 데 성공하며 대통령 권좌를 차지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65년 9월 30일 밤 수카르노의 친위대 소속 운퉁(Untung) 중령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성 6명을 암살하고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을 점령했다. 이때 자카르타 인근의 2개 대대와 하림 공군기지의 공군 병력, 그리고 무장 공산주의자 등 2,000여명이 쿠데타에 가담했다.
암살된 6명을 포함해 쿠데타에 희생된 10명의 군인은 곧바로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다.
1. 아흐맛 야니 대장(추서)
아흐맛 야니(Ahmad Yani) 장군은 구질서시대(Orde Lama)에 인도네시아 육군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1922년 6월 19일 뿌르워레조의 제나르(Jenar)에서 태어났다. 일본군 강점기 시대에 마글랑에서 일본군 보조단체 성격의 헤이호로 입대해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이후 보고르에서 국토방위군(PETA)으로 편입했다.
군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48년 마디운에서 벌어진 공산당 반란 진압군에 참여했고 이후 중부자바에서 다룰이술람 반군 진압에도 나섰다.
1958년에는 ‘8.17작전’ 사령관이 되어 수마트라 빠당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인도네시아공화국 혁명정부(PRRI)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1962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1965년에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하야를 도모한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그를 눈엣가시로 본 공산당이 9.30 사태가 벌어진 1965년 10월 1일 새벽 그를 관저에서 살해했다.
2. 수쁘랍토 중장(추서)
수쁘랍토(Soeprapto)는 1920년 6월 20일 푸르워꺼르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반둥왕국 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1942년 일본분이 자바에 진주하고 네덜란드군이 항복하면서 군경력도 일단 중단되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선언을 한 후 군으로 복귀한 그는 찔라짭에서 일본군 무기를 강탈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뿌르워꺼르토(Purwokerto)에서 국민치안군(TKR)에 입대한 그는 영국군/네덜란드군을 상대로 한 암바라와 전투에서 수디르만(Sudirman) 사령관의 부관으로 참전했다. 군에서 전성기를 맞았지만 노농적위대 성격의 제5군 창설 요구를 거부하는 편에 서면서 공산당 눈밖에 나 9.30 사태때 목숨을 잃었다.
3. S. 빠르만 중장(추서)
시스원도 빠르만(Siswondo Parman)은 1918년 8월 4일 중부자바 워노소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일본군 강점기 시절 일본의 헌병대 본부로 파견돼 정보부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독립선언 이후에는 인도네시아군에 몸담았고 정보장교로서 군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공산당이 제5군을 창설하려는 계획을 가장 먼저 파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1965년 10월 1일 새벽, 반란군에게 납치되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살해당했고 이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다.
4. M.T 하리요노 중장(추서)
M.T 하리요노의 본명은 마스 티르토다르모 하리요노(Mas Tirtodarmo Haryono)다. 그는 1924년 1월 20일 동부자바 수라바야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되기 전 일본군 강점기 당시 자카르타의 의과대학에 다녔으나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후 국민치안군(TKR)에 입대하면서 소령 계급장을 달았다.
그는 언어에 능통해 네덜란드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했고 인도네시아군 사절단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1950년 네덜란드에서 무관으로 근무했고 병참국장을 거쳐 1964년엔 육군사령관 제3차관보에 올랐다.
5. D.I 빤자이탄 소장(추서)
더글라스 이그나티우스 빤자이탄(Donald Ignatius Panjaitan)은 1925년 6월 9일 따빠눌리의 발리거(Balige)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군의 또 다른 보조부대인 의용군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독립선언 이후에는 리아우의 뻐깐바루(Pekanbaru)에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TKR이 구성되자 곧바로 입대해 군경력을 쌓았다.
말년에 그는 육군사령관 제4차관보에 올랐고 미국 유학도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6. 수토요 소장(추서)
수토요 시스워미하르죠(Sutoyo Siswomiharjo)는 1922년 8월 28일 중부자바 꺼부먼(Kebumen) 태생이다.
그는 일본군 강점기에 자카르타 공무원 양성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뿌르워레조(Purworejo) 군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독립선언 후엔 TKR 헌병에 입대해 가똣 수브로토(Gatot Subroto) 대령의 부관으로 일했고 이후 뿌르워레조의 군 제2헌병 연대장이 되었다.
1961년에는 육군 사법감사관이 되었으나 G-30-S. 공산당 제5군 창설을 반대하다가 9.30 사태에서 희생되었다.
7. 까땀소 소장(추서)
1923년 2월 5일 중부자바 스라겐 출생인 까땀소(Katamso)는 일본군 강점기 시절 보고르에서 PETA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솔로에서 쇼단쬬, 즉 소대장이 되었다.
독립선언 후에는 TKR에 입대했으며, 1958년에는 서부 수마트라에서 8월17일 작전 A 사령부 대대장으로 PRRI 반란진압군으로 참전했다. 이후 부낏띵기에서 디포네고로 전투훈련단 연대참모장을 역임했다.
8. 삐에르 뗀데안 대위(추서)
삐에르 뗀데안(Piere Tendean)은 1939년 2월 21일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2년 사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이후 메단 소재 제2지역군 부낏바리산 부대 제2사령부 제니 전투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인도네시아가 깔리만탄에서 말레이시아와 국지전을 벌이던 당시에는 말레이시아 영토 침투작전에도 투입되었다.
1965년 4월 전군사령관 겸 국방치안조정장관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 장군의 부관으로 발탁되었다.
9.30 사태 당시 그를 나수티온 장군으로 오인한 반군들에게 붙잡혀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그는 자신이 나수티온이라는 거짓 자백을 했고, 그 사이 실제 나수티온 장군은 이라크 대사 관저로 피신할 수 있었다.
9. K.S. 뚜분 일급경사(추서)
까렐 사추잇 뚜분(Karel Satsuit Tubu)은 말루쿠 동남부의 뚜알 출신으로 1928년 10월 14일 태어났다.
그는 암본에서 경찰학교를 나와 2급 경관보로 암본 기동경찰대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자카르타 경찰청 기동타격대로 전보되었다가 1955년에는 북부 수마트라 메단, 1958년에는 다시 술라웨시로 전보되었다.
9.30 사태 당시 그는 A.H 나수티온 장군 옆집인 Y. 레이마나 박사의 관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나수티온 장군 관저에서 벌어지고 있던 수상한 상황을 보고 조사하러 나섰다가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10. 수기요노 대령(추서)
수기요노(Sugiyon)는 1926년 8월 12일 족자 구눙끼둘(Gunung Kidul) 지역 끈다란(Gendaran)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일본군 강점기에 PETA에 들어가 군사교육을 받고 워노사리(Wonosari)에서 분단쬬, 즉 분대장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후에는 여러 반란 진압 작전에 동원되었다.
1965년 10월 1일 수기요노는 뻐깔롱안(Pekalongan)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072 지역본부를 이미 장악하고 있던 일단의 공산당들에게 붙잡혀 족자 인근 끈뚱안(Kentungan)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1965년 10월 22일 발견되어 족자 소재 스마키 영웅묘지(Taman Makam Pahlawan Semaki)에 묻혔다.
인니투데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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